Solo Exhibition
VERY ART
Mar 19 - May 16, 2020
OIC Museum of art, Seoul, South Korea
전시 정보
VERY ART
2020. 9. 4 – 10. 16
OCI 미술관 1, 2, 3층 전시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우정국로 45-14
문의 김소라 수석큐레이터(02-734-0440 / ksr@ocimuseum.org)
http://ocimuseum.org/
@ocimuseum
Exhibition Details
VERY ART
Sep 4 - Oct 16, 2020
45-14, Ujeongguk-ro, Jongno-gu, Seoul, Korea
E-mail. ksr@ocimuseum.org
http://ocimuseum.org/
@ocimuseum
OCI미술관(관장: 이지현)은 오는 3월 19일부터 5월 16일까지 샌정(Sen Chung, 1963~, 전주 생)의 초대개인전 를 개최한다.
독일 뒤셀도르프와 한국을 오가며 작업하는 샌정은 회화의 본질에 대하여 오래도록 천착해 왔다. 노스탤지어와 멜랑콜리한 감수성을 기반으로 낭만적인 회화를 보여준 그는 최근 몇 년 전부터 구상에서 반추상으로, 기하학적 추상 표현으로 작업 세계가 변모해왔다. 이번 전시에서는 변화의 경향이 더욱 심화되어 원시적(primitive)으로 여겨질 만큼 몇 가닥의 색과 선으로 자유롭게 작품을 채우며, 형상의 틀에서 벗어나 내밀함을 강조한다
그림을 그리는 창작자이자 그림과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감상자로서 관조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그에게 캔버스는 주관성과 보편성이 마주하고 충돌하는 장(場)인 동시에 중립을 지키는 중성적 공간이다. 캔버스 안에서 물질과 정신은 상호 교환되며, 그 과정에서 회화 고유의 호흡이 생겨난다.
샌정의 작업을 들여다 보면, 얼핏 모노 톤의 화면으로 균질하게 정돈되어 있는 듯하지만, 물감의 두께감, 선의 갈라짐, 색의 충돌 등 회화적 요소로 인해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다. 작품마다 지닌 리듬감 안에서 색과 선은 뭉쳐지고, 흩어지고, 미끄러진다. 미세하지만 분명한 긴장과 균열은 그의 작품 속 대기감에 섬세하게 파문을 일으키는데, 이 잔잔한 운동 속에서 어느 쪽으로도 지나치게 치우치지 않는 미묘함이야말로 샌정 작품에 주요한 분위기이다.
이러한 감각을 작가 본인은 ‘부유감’이라고 표현하곤 한다. 달리 말하면, 창작 활동 중 끊임없이 감각과 사유의 상호 탐색과 침투가 벌어지며 그 지난한 과정이 마침내 가라앉을 때, 비물질적인 사유가 떠다니다가 캔버스 위에 침전하여, 그렇게 회화가 된다.
마치 시공간의 제약을 벗어난 듯 사유를 펼쳐내는 샌정의 작업을 통하여 이 전시가 회화가 펼쳐 보이는 세계를 엿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회화적인, 너무도 회화적인
캔버스를 마주한 화가에게 그림이란 어떤 의미인가? 수 세기 동안 화가들이 스스로 질문을 던져보았을 이 미술사적 과제는 작가 샌정에게도 오랜 탐구의 대상이자 작품의 주제 의식이었다. 특히 최근 그의 작업은 회화성, 회화‘의’ 세계, 회화‘와’ 세계에 대한 고뇌를 거듭한다. 지난 몇 년간 그의 개인전 제목인 ≪그림 연습/ 그림 그 자체/전시장의 그림/형태에서 세계로/우주를 형성하기/그림들≫만 살펴보더라도, 개념적이며 포괄적인 단어를 선택하여 그의 작업에서 구체적이고 감상적인 접근 대신 객관적인 이론화와 추상화가 꾸준히 가속되어 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번 OCI미술관의 개인전 역시 <VERY ART>라는 묵직한 제목의 전시이다. 그만큼 작가가 소신껏 준비한 것으로 이 전시는 그의 사유가 어떻게 캔버스 안으로 수렴되고 있는지를, 그리고 회화 세계가 어떻게 펼쳐지는지를 망라하여 보여주는 자리이다. 우선, 샌정 본인은 이 전시를 이렇게 규정한다.
VERY ART
회화의 심미적 영역과 관련해 미적 판단의 테두리 안에서 그려내지고
ART적인 너무도 ART적인 생각의 궤적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세계를,
흐릿하게 관조의 중심 축으로 자리하는 형상들을 추상적 노스텔지어와
멜랑콜리아로 표현한 전시
‘ART’라는 거대 담론의 전제 아래, 그가 추구하는 회화는 주관적 표현이나 감각적 쾌락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답다’고 판단 내려지는 것이다. 칸트가 『판단력 비판』에서 천명한 무관심성, 일체의 관심 없이 대상을 판단하는 것이자 ‘상상력과 지성의 자유로운 유희에 있어서 나타나는 마음의 상태’로, 샌정의 회화에는 필연적으로 거리 두기, 즉 관조의 태도가 요구된다. 그림을 그리는 개성적인 창작자인 동시에 그림을 무관심적으로 바라보는 감상자의 입장이 되어야 하는 화가에게 캔버스란 주관성과 보편성이 마주하고 충돌하는 장(場)인 동시에 중립을 지키는 중성적 공간이다. 말 그대로 일종의 ‘회색지대’로서 캔버스는 펼쳐지는데, 샌정은 실제로도 캔버스 위에 밝은 회색 물감을 올려 배경을 그린다. 여기에는 옅은 듯, 혹은 짙은 듯, 깊이를 헤아리기 어려운 대기감(大氣感)이 어려 새로운 차원의 세계로 우리를 이끈다. 실제에서는 어디에도 있을 법하지 않은, 이 가상의 세계는 감상자로 하여금 철학적 의미를 찾고 존재론적 가치를 부여하고픈 욕망을 불러일으키나, 회화는 그 자체로 침묵하며 섣부른 ‘자리매김’을 거부한다.
‘ART’라는 거대 담론의 전제 아래, 그가 추구하는 회화는 주관적 표현이나 감각적 쾌락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답다’고 판단 내려지는 것이다. 칸트가 『판단력 비판』에서 천명한 무관심성, 일체의 관심 없이 대상을 판단하는 것이자 ‘상상력과 지성의 자유로운 유희에 있어서 나타나는 마음의 상태’로, 샌정의 회화에는 필연적으로 거리 두기, 즉 관조의 태도가 요구된다. 그림을 그리는 개성적인 창작자인 동시에 그림을 무관심적으로 바라보는 감상자의 입장이 되어야 하는 화가에게 캔버스란 주관성과 보편성이 마주하고 충돌하는 장(場)인 동시에 중립을 지키는 중성적 공간이다. 말 그대로 일종의 ‘회색지대’로서 캔버스는 펼쳐지는데, 샌정은 실제로도 캔버스 위에 밝은 회색 물감을 올려 배경을 그린다. 여기에는 옅은 듯, 혹은 짙은 듯, 깊이를 헤아리기 어려운 대기감(大氣感)이 어려 새로운 차원의 세계로 우리를 이끈다. 실제에서는 어디에도 있을 법하지 않은, 이 가상의 세계는 감상자로 하여금 철학적 의미를 찾고 존재론적 가치를 부여하고픈 욕망을 불러일으키나, 회화는 그 자체로 침묵하며 섣부른 ‘자리매김’을 거부한다.
오히려 그의 회화에서 먼저 감지되는 것은 캔버스 표면의 붓질과 물감으로 이루어진 물질성이다. 붓을 든 작가의 제스처에 따라 표현되는 고유의 호흡은 화폭 위로 형상을 떠 오르게 하고, 또 깊숙이 가라앉게 한다. 샌정의 전작(前作)에서 이 형상들은 이국적인 여인상이나 들판 위의 백마처럼 몽환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면, 이 형상은 점차 반추상에서 기하학적 추상으로, 그리고 이번 전시에서는 몇 가닥의 선으로까지 응축된다. 형상의 기화(氣化)라고도 할 수 있는 이 과정에서 작가의 회화-밖-경험은 회화-안-형태로 나타나기까지 무수한 정보의 생략과 함축, 감성의 증폭과 절제가 포개어지고 가다듬어진다. 그 결과, ‘이것은 OO을 뜻한다.’라는 정의 대신 아무것도 확인되지 않는 무심한 바닥으로 작품을 이끈다.
원시적(primitive)이라고 여겨질 만큼 형상의 틀을 벗어나 내밀함을 강조하는 그의 회화는 얼핏 모노 톤의 화면으로 균질하게 정돈되어 있는 듯하다. 하지만 그의 작품을 조금만 더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물감의 두께감, 선의 갈라짐, 색의 충돌 등 회화적 요소로 인해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다. 그의 작업에서는 개별 작품마다 고유의 리듬을 가지고 있기도 하거니와 때때로 동일한 모티브가 여러 점의 작품을 통해 변주되고는 하는데, 그 속에서 색과 선은 뭉쳐지고, 흩어지고, 미끄러진다. 미세하지만 분명한 긴장과 균열은 그의 작품 속 대기감에 섬세하게 파문을 일으키는데, 이 잔잔한 운동 속에서 어느 쪽으로도 지나치게 치우치지 않는 미묘함이야말로 샌정 작품에 주요한 분위기이다. 작가는 이를 ‘부유감’이라고 표현하곤 한다. 달리 말하면, 창작 활동 중 끊임없이 감각과 사유의 상호 탐색과 침투가 벌어지며 그 지난한 과정이 마침내 가라앉을 때, 비물질적인 사유가 떠다니다가 캔버스 위에 침전하여, 그렇게 회화가 된다.
뻔한 얘기 같지만, 결국 회화는 물질과 정신의 상호 교환 속에서 그 책무를 이행한다. 샌정은 작가 노트에서 “세계는 회화라는 장르에 생각이 이르게 하고, 회화는 숙명처럼 그 세계를 열어 보인다.”2 라고 고백한다. 그에게 회화-밖-세상은 회화-안-세상으로 이동 가능한 동시에, 두 세계는 전체로서 동일하다. 은폐된 세계의 본질은 작가의 감성적 주관성이 가까스로 세계의 보편성과 마주하게 될 때 비로소 드러난다. 샌정의 회화에서 ‘추상적 노스텔지어와 멜랑콜리아로 표현되는’, 그 그리움과 아득함의 대상이야말로 예술의 근원일 것이다. 결코 도달할 수 없을 그 기원을 찾아 헤매는 행위 자체가 ‘VERY ART’한 것이 아닌가. 샌정의 작업은 이렇게 영원히 지속될 비완성의 노정을 걸으며, 화가로서 그리고 예술가로서 오늘도 묵묵히 세상을 그린다.
김소라 (OCI미술관 수석큐레이터)
VERY ART에 대하여
이번 작품들에서 서리는 모노크롬적인 대기감 안에서, 의도적인 단조로움 뒤로 기대하지 않았던 난해함이 의미심장하게 공존한다고 보여집니다. 여기서 만나지는 상반된 두 세계는 이런 저런 감정과 인상을 야기 시킬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늘 저의 관심의 한자리였던 18세기와 19세기의 낭만주의와 관련된 맥락에서의 로맨틱, 이번 전시는 한편으론 ‘로맨틱 추상’ 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저의 지난 시간의 작품들이 로맨티시즘을 위해 구상 이미지들에 의한 어떤 알레고리나 메타포를 필요로 했던 성격을 지녔었다면, 근래의 작품들은 보다 내용적으로는 내면세계에는 직접적이나, 형식적으로는 한걸음 뒤로 물러선 추상적 노스탈지어와 맬랑콜리아로 인지하면서, 또한 ‘새로운 로맨티시즘’에 다가서는 자세로 작품에 임한 느낌을 가집니다. 어린 시절 밤하늘의 별자리들이 무수한 신화 뒤로 왠지 필연이라고 여겨왔듯이 그렇게 화면에 여러 형상들은 절대적인 가치로서 각각의 자리에 섭니다. 이런 캔버스의 평면을 쫓아나서는 저 만의 회화세계의 그 어떤 무엇은 분명 일정의 공기감 아래에 놓이며 이는 때때로 명상적인 무드를 보입니다.
Art는 가장 투명하고 견고한 다이아몬드를 닮은 하나의 ‘감성적 지성’(emotional intellect)로써, 인간의 존재론적, 감성론적 사고를 어느 일정 높이까지 밀어 붙여 일상이 주지 못하는 기류 안에서 다른 세계를 제시하며, 이로 인해 가끔은 철학이 감지되는 다른 차원의 조감도를 준다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우주와 대자연에서 sublimity라는 숭고미 또는 장엄미를 희소성 안에서 접하지만 또한 masterpiece또는 magnum opus라 일컫는 어느 미술관의 걸작에서도 같은 리그의 경이로움을 경험합니다. Art는 그렇게 의식주 밖에서 때때로 수동적으로 머무르는 듯 하나 의미론적 태도에서는 상당히 근거리에서 세계관을 뒤돌아보게 만든다고 봅니다. 이것이 Art이며, 쇼펜하우어의 한 글귀처럼 ‘이 세상을 그나마 견딜만하게 하는 유일한 것은 Art다’ 라는 명제 하에 한 화가로서 소명을 가집니다. Art는 그렇게 오래전부터 모든 문명 안에서 일정 시점 한 설렘의 꽃 봉우리였었고 나아가 삶에 향기를 주는 활짝 피어난 정신적 환희였습니다.
저에게 놓여있는 회화의 근간은 사각의 평면 안에서, 그 directness라고 일컫는 직접성이 내재한 단조로운 형식 안에서, 내용적인 실험을 개인적 감수성과 이해를 바탕으로 의미있는 ‘미적 판단’에 의한 미학적 접근을 시시포스의 신화처럼 반복하려 하는 것입니다. 이 안에서 기대하는 것은 제가 때때로 미술관 안 몇 걸작들 앞에서 만나는 그 어떤 것과도 대체 불가한 한 캔버스 작품의 그 ‘또 다른 하나의 세계’입니다. 인문학에서 정서적 온도감이 가장 넓은 스펙트럼을 가진 것이 회화가 아닐까 추측하면서, 2만년이 넘는 역사 안에서 이어지고 있는 이 단순한 평면의 형식이 어떤 때는 형이상학의 언저리에서 특정의 경이로움으로 진지하게 자리함을 저의 작품을 통해 확인하고 싶습니다.
2020 샌정